그날따라 TV를 보는 이는 적었다.
2003년 6월
대원들은 신임소초장이 온다는 소식에 내심 반가워하고 있었다.
이제는 지겨운 생활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 또한 이 캄캄한 골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희망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제는 조금은 풀어주고 싶거니 했다. 계속되는 검열과 훈련으로 인해 다들 육체적으로 고단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우리 소초에 선물이 왔다. 커다란 수박 몇통과 빵 한박스였다. 정말 대박이었다.
몇주전 이곳을 방문한 공무원중에 지갑을 분실한 이가 있었는데, 우리가 탐색작전중에 그것을 찾아줬던 것이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이렇게 커다란 선물을 보내준 것이다.
대원들은 환호했다. 이런 섬에서 나가는 휴가란 고작 1년에 두번이니
저런 빵과 수박은 구경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휴가를 나가서도 먹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 휴가를 나가면
그런것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연인만이 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니 수박이니 빵이니 그것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 것일까.
물론 과일이야 간식으로도 부대에서 가끔씩 제공되지만, 일명 싸제 음식들은 보기에도 먹기에도 얼마나 좋은지
경험해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것을 소초장이 확인도 하기 전에 누군가 오전 오침중에 빵을 미리 꺼내먹은 것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해안소초에서는 경계작전에 교대로 들어가니 함께 식사도 간식도 먹지 못한다.
그러니 간식이나 건빵은 자기 근무철수시간때에 와서 꺼내먹게 하였다.)
소초장인 나는 저녁때 그것을 공표하고, 나누려했었다.
단지, 대원들은 소초생활특성상 그냥 자기 근무 철수시간때에 꺼내먹을수 있는 것이고, 견물생심이라고 그것을 보고 군침만 삼킬수는 없잖은가.
하지만 그때의 소초장은 신임소초장이 오기전에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려 했었고
그 와중에 이런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정말 사소한 것이다...
밥먹듯이 늘 대원들에게 하던 말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건 하기전에 소초장에게 먼저 보고하라"고.... 지휘체계를 통하라고 했다...
소초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꺼내먹은 것에 대해 나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우리에게 돌아온 그 먹음직스러운 하사품을 인근소초와 중대에 죄다 돌려버리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단지 그 빵 몇봉지 때문에...
중대장에게 보고후 몇분후 중대차량이 왔고, 그 수박들과 빵상자를 트럭에 싣게 하였다.
먹음직스러운 하사품을 떠나보내는 대원들의 눈빛을 나는 차마 쳐다볼수 없었다.
그날따라 상황실이나 주계, 내무실은 조용했다.
그날따라 TV를 보는 이도 적었다.
얼마나 서운했던지 모두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
.
.
가끔씩 난 내 자신에게 질문을 하곤 한다.
'그때의 나의 행동이 그렇게 바람직했던 것인가'
'그들에게 벌을 내린 내가 정말 잘한 것일까?'
'그 빵과 수박을 그들에게 꼭 빼았는 방법밖에 없었는가?"
단지 벌로 먹을 것을 빼앗았을 뿐인데, 그런것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는 분들도 있겠다.
하지만 군대는 다르다. 초코파이 하나에도 눈물흘리고 연약해할수 밖에 없는 곳이 군대이다.
지난 일이겠거니 그냥 덮을수는 없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혼내다 보면 그 시절의 쓰라린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수박들과 빵상자....' 그리곤 내 마음을 사정없이 내몰아친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을 혼낼때도 함부로 욕설도 소리도 못지른다. 반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도 나와 같은 인격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때의 나의 행동이 정말 바람직했을까....
... 그날따라 TV를 보는 이는 적었다.
.
.
.
... 수박들과 빵상자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