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율어
처마에 걸린 빨래 지키는 강아지 - 보성 율어
이제는 '인공만세'라는 네 글자를 기억하는 사람도 몇 남지 않았고, 해방구 시절의 기억은 사회적인 망각으로 체화되었다. 집주인이 자리를 비운 집에서 빨래를 지키고 있는 강아지가 홀로 반겨주는, 이 조용한 남도의 산골인 율어는 해방 직후에는 '보성의 모스크바'로 통하였다.
** '보성의 모스크바'라는 표현은 1995년 보성군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보성군사'에서 빌린 표현임을 밝혀둡니다.
*** Francis님의 답글에 대하여 부연설명을 좀 달려고 하는데, 자기 게시물에는 답글을 달 수가 없군요. 부득이 게시물을 수정해서 설명을 붙이겠습니다.^^ 일단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
태백산맥에 나오는 해방구 율어의 세세한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하지만 14연대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꽤 긴 기간 동안 율어는 계속 빨치산 세력 밑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남한 내 빨치산 세력들이 사실 상 활동역량을 잃고 버티기에 들어갈 때까지는 그런 상태였다고 하는군요. 그것을 시기적으로 본다면 1948~49년 사이 겨울 때까지일 것이고, 그 이후에도 밤에는 빨간 개가 낮에는 검은 개와 노란 개가 짖어대는 상황이 율어민들에게 잔인하게 반복되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제가 어찌하다보니 여순민중항쟁에 대한 어설픈 논문을 하나 쓰게 된 관계로 얻은 율어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좀 더 설명드리자면...
율어는 보성의 다른 곳에서도 특히 일제시기에 억압과 착취가 심한 곳이어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발표가 난지 두 시간만에 율어에 있는 신사에는 불길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만큼 민들의 분노가 쌓였던 지역이라 좌익들이 많이 지지를 얻었고 지형적인 요인으로 '보성의 모스크바'로 통하게 됩니다. 보성에서 도시화된 벌교에 버금갈 정도로 좌익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독특한 곳으로 파악이 됩니다. 그러나 민들의 자발적인 인민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해서 무력화되고, 미군정의 정책은 민들의 요구와는 정반대였습니다.(자세한 것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나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 1946년에 율어민 2천명이 모여서 해방 1주년 기념으로(?) 율어지서에 불을 지르고, 이 사건으로 당시 동아일보에 보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실리게 됩니다. 이어서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좌익세력을 불법화시키고, 이에 좌익세력은 지하투쟁/무력투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기에 한반도는 내전의 분위기에 빠지게 되지요.
율어는 이런 남한 정세 속에서 1948년 14연대의 반란으로 또 다시 피바람에 휘말리게 되구요, 결국 '내전의 마지막 전투'인 1950년 한국전쟁을 끝으로 휴전이 되어서야 일단 안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 그 당시 일을 물어보시면 잘 말씀안해주실껍니다. 살기 위해서 반공이데올로기를 체화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의 기억은 사회적으로 망각을 강요받은 셈입니다. 제주도가 고향인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1948년 4.3 당시 이야기해달라고 하면 잘안해주신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같은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저도 논문이랍시고 허접한 글 하나 준비하면서 얼마전에 알았습니다. 제 아버지가 태어난 율어 저 마을에서 제삿날이 같은 사람이 17명이라는 사실을요.
쓰고나니 너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Francis님, 사진에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