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 마지막 이야기
증발[마지막 이야기]
드르르르르륵. 진동으로 맞추어둔 전화기가 땅을 긁으며 움직이고 있다. 억지로 손을 더듬어 전화기를 열었다.
-안녕
발신인 미상의 문자 하나. 누군지 발신번호까지 지우느라 귀찮았겠군, 하고 다시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이 아릿할 만큼 피곤한데도 잠이 다시 들지 않는다.
누굴까. 저건 인사일까 작별일까, 젠장 난 문장부호 빼먹고 글 쓰는 것들이 제일 싫어. 도대체가 무슨 뜻인지 알아 먹기가 힘들잖아? 그렇지만 이런 밤에 님아 안녕하세요 호호호 이런 건 아닐테니 역시 안녕- 이런 걸까나...두서없이 펼쳐지던 생각이 한 점에서 딱 멎었다. 딱 한사람, 내게 이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않던 사람이 있었지. 설마.
벌써 수년도 더 지났다. 들려오는 풍문도 끊어진 지 오래, 우왁스럽게 길거리에서 그래 너 얼마나 행복하냐 두고 보자고 소리친지도 오래, 그러고 나서도 흠칫거리며 머뭇거리기를 한참끝에 잊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지도. 그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부터가 새삼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긴 했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고 길게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심지어, 전화벨 소리가 울리는 환청마저도. 전화기는 진동이란 말이다, 한숨을 크게 쉬고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바다에서, 그것도 좋겠지.
도대체 이 말이 왜 생각났을까. 언젠가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 선원들이 바다에서 생명을 마쳤을때 선택했다는 水葬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말을 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다. 결국 입으로 젠장 Cx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면서 차에 올랐다. 지금 출발하면.. 아침에나 도착할 수 있을까.
처음 함께 갔던 바다는 생각했던 것만큼 운치있지 못했다. 우리는 그 때 아무도 없이 호젓하고 쓸쓸한 바람부는 황량한 바다를 기대했지만, 한겨울에도 관광지로 유명한 그곳에는 수많은 장사치와, 연인들과, 민박집들로 그득했다. 그 바다, 그곳에서 그 사람의 목소리는 세이렌의 그것만큼이나 아련하고 아찔하게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다. 헤어진 다음에도 내가 그 사람을 쉽게 잊지 못했던 것은, 그날의 그 목소리를 쉽게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차를 타고 정신없이 그 바다를 향해 달려가면서, 억지로 지웠던 그 날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가는 이곳에 그 사람이 있다면, 우연과 망상과 무모함이 엮어낸 오늘 이 소동의 끝에 당신이 있다면, 모든 것을 잃더라도 다시 당신을 사랑한다고, 절대로 당신을 놓을 수 없다고 말하리라. 거기 있어라, 제발. 주문처럼 내내 이 말만을 입에서 놓지 않았다.
아침 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해가 떠오른 뒤에야 다다른 곳에는 이전의 기억과는 다르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쇠락한 마을, 버려진 물건들 사이를 헤집어 걸어간 끝에 낯익은 물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앞에 조로록 남겨진 발자욱들.
파도가 쉬임없이 다가와 그 발자욱을 한소큼 한소큼씩 지워가고 있었다. 내가 있고, 그 사람이 있었고, 우리 둘의 기억이 있던 자리에서 그 사람은 내가 보기를 기다리고 있던 양 흔적만을 잔뜩 남기고 증발해 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넓은 바다 앞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섞은 채로 그 사람을 불렀다. 사라져 버림으로써 나를 영원히 그 기억에 묶이게 만들어버린 그 사람을 저주하면서 목이 터져라 그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