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본 용호농장
용호농장. 부산 토박이들한테는 '문디촌'이라 해야 정확히 알아듣는다.
한때 나병 환자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수형번호 같은 이름 ‘문디촌’
지금은 모 건설회사에서 대단지 아파트를 건립하기 위해 한창 공사 중인 그곳.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 부산에서 사진 한다는 사람들은 모조리 한번씩 가봤음직한 ‘용호농장’.
궁금했다. 예전의 치기어린 랜즈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었던 그곳이 어떻게 변했을까...
‘용호농장’에 원래부터 나환자들이 모여 살던 곳은 아니었다.
앞바다가 조류의 흐름이 빨라 어촌으로 형성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얼마 살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을뿐.
그러다 언제부턴가 나병환자들이 하나둘씩 모여 살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떨어진 섬에 살던 나환자들이 생계를 위해 뭍으로 온 것이다.
그렇게 하나 둘씩 모여 마을을 이루고 그들은 주된 업으로 계란을 팔았다.
굽은 손가락으로 조그만 농장을 만들고 닭을 키워
그 계란을 내다 팔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소문에 의하면 경남 지방의 계란 4분의 1 정도가
여기서 나는 것이라 할만큼 제법 큰 농장 이었다.
그 시절부터 ‘용호농장’이라 불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그들은 왜 용호동에 정착했을까?
지리적으로 ‘용호농장’의 위치는 아주 절묘하게 은폐되어있다.
지금이야 이기대 쪽에서 돌아들어갈수 있는 아스팔트 길도 나있지만
예전에는 용호농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작은 길 하나였다.
그 길도 언덕을 넘어 굽굽이 돌아가야만 마을이 나타나는
세상의 멸시와 조롱을 받고 살기에 지친 그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이곳은 살기 좋은 곳만은 아니었다.
‘용호농장’ 못 미쳐서 지금의 용호동이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들어설 즈음
주민들의 반대와 멸시는 이루 말 못할만큼 이들에게 고통이었다.
한때 군인들이 ‘용호농장’의 유일한 길목을 지키고 나환자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적도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병 치료약들이 개발되면서
‘용호농장’의 나환자들은 그 수가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다.
처음 정착을 했던 나환자 1세대들은 점차 병으로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용호농장’에 새로운 이주민들이 조금씩 유입되기 시작했다.
한창 판자집 재개발 사업의 소용돌이를 이기지 못하고 떠돌던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게 된 것이다.
이후 양계업 뿐만 아니라 소규모로 공장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게 된다.
신발 공장, 가구 공장 등
큰 규모의 공장까지 들어서면서 ‘용호농장’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국이 부동산 붐에 술렁이면서
육지이면서 작은 섬이기도 했던 ‘용호농장’은 그 거센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건설회사가 정부로부터 개발권을 따내면서
대규모 관광 주거 단지가 조성된다는 발표에
이권싸움에 주민들끼리 서로 크고 작은 싸움도 여러 번 났다.
이후 수년간의 시간이 흐르고 얄팍한 보상금 얼마를 받아든 ‘용호농장’사람들은 어디론가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보상금으로 제대로 된 전셋집 하나 얻기 어려운 그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사진을 직기 위해 이곳 저곳을 뒤적거리면서
나는 여러 가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신 기계를 돌리며 일하는 사람들
그들의 작업복, 그들의 이불 쪼가리, 그들의 밥그릇과 숟가락
운동화 바닥에 바스락 하며 부서지는 유리조각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것들조차
한때는 커다란 창문으로 제 몫을 톡톡히 했었을게다.
작은 집들과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차
한때는 골목 골목 마다 아이들 재재 거리는 소리로 씨끄러웠을
‘용호농장’의 가파른 골목들
‘용호농장’을 다시 찾아간 날은 몹시 흐렸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소위 빛 좋은 날보다 내겐 다행이었다.
차를 몰고 고개를 넘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작 놀랐다.
이미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공사가 빨리 진행중일줄은 몰랐다.
산머리까지 빼곡하던 집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한동안 공사를 멈추었던 까닭인지 무성한 잡초들만 그 터를 채우고 있었다.
군데 군데 박혀있는 구획정리 표지판 만이
횡 하니 멋없게 서있다.
‘용호농장’의 유일한 성당이자,
동네 꼬맹이들의 놀이터였던 ‘오륙도성당’은 이제 없다.
사람이 떠난 마을에 신은 더 이상 살지 않는다고 했던가 ... ...
우연히 만난 할머니 한분
예전에 이곳에 살다가 지금은 저너머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아직 일구던 텃밭이 있어 매일 고개를 넘어 여기 온다고 했다.
“이 좋은 경치가 다 망가질꺼구마”
불쑥 내뱉은 한마디 외에 예전에 좋았던 풍경 얘기만 늘어 놓으셨다.
어릴적 뛰어 놀던 동네 골목길에 관한 아름다운 추억 같은 것은 없다.
아련하게 추억을 뒤지며 회한에 젖는 감상 따윈 역시 없다.
다만 할머니 말대로 좋은 경치가 날라가는 것 뿐이다.
‘용호농장’이 아직 완전히 철거된 것은 아니다.
선착장 쪽에는 아직 철거를 하지 않은 주민들이 몇집 살고 있다.
건설회사 인부들 말에 의하면
아직 보상관계가 정리되지 못한 세대들일 것이라 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나는 좁을 길을 지나는 덤프 트럭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 다녀야했다.
철거 후 건축 폐기물들을 그득 그득 담은 트럭들이
쉬지 않고 먼지를 한 푸대씩 뿌리며 다녔다.
한창 뛰어놀 꼬맹이 하나 골목에 앉아 있다.
웃으며 인사도 하고 아는 척도 해보았건만
꼬맹이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두려움과 낯설음에 가득찬 두 눈 ... ...
폐허가 된 동네에 검은 카메라 들고 사진을 찍는 내게
무언의 불만을 드러내며 할말을 꾹 참은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용호농장’과 꼬맹이의 집 앞 골목은 서로 다른 곳이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용호농장’과 꼬맹이의 집 앞 골목도 역시 서로 다른 곳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필름에 담아 왔는지 ... ...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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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소문과 인터뷰를 통한 나름대로의 정리일뿐 절대적인 역사자료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따라서 잘못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며, 정확히 아시는 분은 언제든지 리플로 글을 남겨 주시면
글을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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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t21 점 net 에 오시면 원본 글과 사진을 보실수 있습니다.
링크가 안되어 일부만 올리네요.
좋게 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