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었던 그러나 섬이 아닌 곳 !!
부산시 남구 용호2동 산2번지의 회색 마을.
바다와 산이 만드는 경계 사이로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오롯이 들어선 회색의 시멘트 집들은 여느 바닷가 빈촌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검은 암석과 회색조의 집, 그리고 집이 만드는 그림자는 대비가 강한 흑백 사진을 연상케 한다. 이 흑백의 풍경은 관광지 오륙도의
소문난 절경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치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서 탈색된 채 되돌아온 것 같은
단색조의 마을은 삭제된 색감만큼이나 외부의 현실로부터 소외된 듯 보인다.
회색의 풍경이 은유하는 사건들
용호농장, 산 2번지, 혹은 문촌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센씨 병을 가진 사람들의 정착지였다.
산과 바다에 의해 외부와 단절되는 지형은 외부의 시선과 최소한의 생존 사이에서의 해법을 위한 지형이다.
이곳이 정착촌이 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10년대 부산시 감만동 상애원에서부터 한센씨 병 환자들은 강제이주와 격리,
외부 주민들의 반발로 인해 오롯한 정착지를 찾기 힘들었다. 해방이후 미국의 월슨 박사와 상애원 대표 몇 사람이 수차례에 걸친 답사 끝에
용호동산을 새 정착지로 결정하고, 당시 군사 작전 지역이었던 이곳을 사용하기 위해 국가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 후 1946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 용호동 주민의 반발을 다소나마 줄이기 위해 시차를 두면서 배편으로 약 270여명이 이주하였다.
이후에도 용호동 본동 사람들과 많은 마찰이 있었으며, 이 와중에 양성환자들은 소록도 병원으로 보내지고
음성환자들만 남아 농장을 경영하면서 자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양계장의 흔적과 공장은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파트 개발을 위해 대부분 이주한 상태이며, 2007년 ‘바다조망이 가능한 레저형 아파트’ 3300여 가구, 16개 동이 들어설 예정이다.
해방이후 자리를 잡기 시작한 용호농장은 철거가 진행 중인 지금까지 외부 세상과 단절되어 왔다. 행정 구역상 속해 있는 용호 2동의 다른 지역과는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산을 타는 1차선의 구불구불한 길이 돌아가는 길보다 더 먼 심리적 거리가 있는 듯하다. 태양 아래 홀로선 수도자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풍경은 묘연한 질병이라는 고통의 깊이를 은유한다. 천형임을 스스로도 부정하지 못하던 환자들에게 희망은 그저 울화증을 부추기는 얄미운 낱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시간이 스쳐가는 찰나일 뿐이라거나 전능한 신이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는 언술들은 이곳 주민들에게 허무나 과장이라기보다 더없는 위로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과 사유로는 자신의 질병의 고통의 이유를 대답할 수 없는 한계에서 더 그러했을 것이다.
사회는, 지나온 시간은 자연적 저주에 감금이라는 해법을 내놓았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지금 시대의 해법은 ‘바다조망이 가능한 레저형 아파트’다. 일단 아파트가 들어서면 ‘산만’하고 ‘시대극에나 나올법한’ 빈촌이 사라져 ‘부산의 이미지가 더 이상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길도 더 늘어나고 지하철도 들어오면 이 지역은 이전과는 다른 곳이 될 것이다. 군사작전지역이었으며 부산의 절경 오륙도 바로 앞에 아파트가 개발되는 것은 여러 맥락에서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생각되지만, 이 글에서는 이 지역과 도심, 도시 그리고 사회의 관계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특성이 지역적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를 보도록 하겠다. 즉, 중심과 지역,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가설이 이글의 전제이다.
격리라는 해법, 공포와 희망
질병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는 것은 환자의 치유라기 보다, 비환자의 전염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다.
격리의 실제적인 효과는 환자를 대상화시키고 격리하는 주체의 안심이다. 이 때 격리와 비격리의 두 집단에는 완치, 치유라는 꿈이 있다.
정상의 건강함은 꿈의 가능조건으로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질병은 정상의 건강함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생각된다.
즉 질병의 상태는 정상의 건강한 사람으로서는 완전히 다른, 불가능한 조건이기 되는 것이다. 격리, 환자의 보호의 결과적인 효과는
비격리의 집단을 위한 안심이며, 전염가능성의 공포로부터의 보호이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
격리/비격리, 환자/비환자의 구분에는 정상/비정상의 상태에 대한 완고한 근대적 구분,
예를들면 이성/비이성, 정상/비정상과 같은 사유와 연관된다. 질병에 의한 격리와 질병으로부터의 치유가 가진 오류에는 보다 근본적 불균형이 있다. 예를 들면, 건강한 정상과 치유를 꿈꾸는 자, 이 양편에게 적용되는 논리와 상황은 다르다. 비질병-건강의 주체가 질병-환자가 될 수 있다는 미연의 가능성은 구조 자체 속에서 극복, 은폐된다. 그러나 질병-환자-격리가 어떤 건강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비격리의 주체에 의해 완전히 배제된다. ‘문디 병신이 어디 사람인가’.
그러면 격리라는 형태의 집단적 조치가 가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며, 어떻게 인간의 분류화와 처리의 권위가 부여되는 것일까.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두 집단 모두 질병에 대한 암묵적인 공포이며, 환자에게는 치유라는 희망의 약속이다.
하지만 환자를 사회와 격리시키는 폐쇄성은 사회 속에서 질병을 전하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실체 자체에 대한 확인 없는 공포가 필요이상으로 과장되는 것이다. 그것은 한센씨 병의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공포, 신체의 유기와 같은 강력한 시각적 공포일 경우 과장의 폭이 더 커지며,
이 시선의 판단은 증상을 목격한 증인이 되며,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분류화하고 격리하고, 처리하는 과정을 용납하는 것이다.
만약 이 시선에 함의된 과잉의 공포, 같은 인간으로서의 심판의 자격에 대한 정당성여부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 채 마이너리티에 대해 동정한다면(그 주체의 의도나 반성과는 별개로), 자신은 거기에 속하지 않았다는 자기위안이며, 보다 넒은 의미에서 하나의 위선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마이너리티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마이너리티이게 하는가, 이다. 스스로 소수임을 자처하고,
비주류임을 통해서 다시 어떤 권력의 형태를 얻어가기 보다 어떠한 형태를 가진 일방향적인 태도와 폭력적 의도를 좌시하지 않는 것이다.
용호농장의 명암(明暗) -섬이었던 그러나 섬이 아닌 곳 글_박은정
(너무길어서...중간생략했습니다..죄송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