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살다보면, 바로 눈 앞에 있지 않으면 금새 잊어 버리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다시 만날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과의 약속이 그 대표적일 것이다. 굳이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약 4개월 전, 인도 여행을 끝낼 즈음에 한 아이와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집으로 돌아오자 그 약속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그리고 한참이 흘렀다. 4개월이 지난 지금에야 슬며시 그 때 사진을 꺼내 보다 그 약속을 떠올렸다. 아...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우리였었는데... 미안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돌아와서 잘 먹고 잘 지내다 보니 그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지금이라도 그 때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쓴다. **************** “맛있는 주스 있어요-” 이야기. “오이시 쥬스 아리마스요.” 바라나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일본어로 말을 건네오는 사람들이 많다. 대충 보고 일본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 날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어가 귓가에 들려왔다. “노. 맛있는 쥬스 있어요..!” 그 일본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들려 주면서 웃으며 지나갔다. 벵갈리 토라 골목길 중간 지점에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만들어주는 생과일 쥬스 가게가 있다. 가게라고 해봐야 리어카 위에 즙을 내는 기계를 가져다 놓은 노점상이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은 shop이라고 부른다. 리어카 위엔 물기를 머금어 신선해 보이는 오렌지가 한가득 놓여 있고, 그 옆에는 항상 붉은 색 석류가 한 바구니 가득 담겨 있었다. “오이시 쥬스 아리마스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13살짜리 소녀 Guari였다. 오렌지 쥬스 작은 컵 한잔에 7Rs, 큰 컵은 한잔에 12Rs 라고 했다. 작은 컵 4잔이나 마실 거니까 1Rs씩만 깍아서 24Rs 하자고 해도 절대 안된다고 했다. 무조건 한 잔에 7Rs. 무슨 어린애가 이리도 야박한가 싶은 마음도 들었었다. "오이시 쥬스 아리마스요.“ 항상 그 녀가 건네는 말은 일본어였다. 쥬스를 마시면서 한국어를 강제로 가르쳐 주었다. “맛있는!!” “마 인 는-?” “노. 맛있는..!!” “맛! 있! 는!” “오케이. 쥬스 있어요.” “쥬스 이써뇨-?” “아니아니, 쥬스 있어요.” “쥬스- 이써요-”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를 내는 듯 했다. 그래서 웃으면서 다 마신 컵을 건네주고 그 자리를 떴다. “맛있는 쥬스 있어요-” 분명한 한국어였다. 어제 하루 대충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오늘은 오렌지가 참 맛있는 오렌지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래? 어디 한 번 먹어볼까?” 그래서 또 오렌지 쥬스를 주문했다. 그녀는 오렌지 쥬스를 주문하면, 항상 그 자리에서 오렌지 껍질을 벗긴다. 즉석에서 쥬스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껍질을 깐 오렌지 몇 개가 기계 안으로 들어가고 손으로 손잡이를 돌리면 오렌지 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오렌지 즙이 바로 우리가 마시는 오렌지 쥬스였다. 100% 생과일 쥬스. “맛있는 쥬스 있어요-” 쥬스를 마시며 앉아 있노라니 웬 꼬마 녀석이 나와서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어라? 이 녀석은 뭐야? 하면서 쳐다봤더니, 그녀의 남동생이라 했다. 어느새 남동생에게까지 가르쳤나 보다. 남동생은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처음 보는 주제에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무릎에 앉혀달라고도 했다. 누나나 남동생이나 항상 생글생글 웃는 인상이라, 보는 사람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 녀석들이 할 줄 아는 한국어는 단지 “맛있는 쥬스 있어요-” 뿐이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쥬스를 마시는 동안은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에? 이 녀석 다리 봐바.” Guari의 남동생 라즈는 10살. 그런데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절뚝절뚝- 오른쪽 다리를 저는 것이었다. “어디 아픈가?” “글쎄다, 날 때부터 안 좋은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앉혀 달라고 할 때도 점프를 못하더니만.” 우리끼리 한국어로 하는 이야기였던지라, 그 애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인도에는 이런 아이들이 많았다. 정상인들만큼이나 불구자도 많은 곳. Guari의 오른손은 유달리 컸다. 나에 비해 10년 이상이나 어리지만, 그녀의 손은 나보다 크다. 나보다 훨씬 키도 작고, 몸집도 작지만 오른손만큼은 나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많이 거칠었다. 거무죽죽하고, 손가락이며 손바닥은 온통 이리저리 갈라져 있었다. 손을 잡아보면 꼭 사포 표면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거칠었다. 그것이 13살짜리 소녀의 손이었다. 언제부터 손이 이랬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했다. 쥬스를 만드느라 항상 물에 손을 담그고 있어야 하고, 바라나시의 날씨가 워낙 건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인도에서는 손이 작고, 예쁜 여자가 사랑받는다는데- 손이 이래서 어쩌냐고 했더니, 겸연쩍은 듯 웃고 말았다. 장사를 그만두면야 손을 낫게할 수는 있겠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그만 둘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Guari는 매일 아침 9시면, 리어카를 끌고 나와 장사를 시작하고, 저녁 8시 경에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가족은 어머니와 병든 오빠, 그리고 3개월 전에 높은데서 떨어져 뼈가 부러져 절뚝거리는 남동생. 아버지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느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가 쥬스를 팔아서 하루 버는 돈은 80-100Rs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2160 - 2700원 정도의 돈이다. 어머니가 벌어오는 돈과 그녀가 버는 돈으로 겨우 겨우 생활을 유지해나간다고 했다. 대부분의 돈은 오빠의 약값으로 쓰인다고 했다. 오빠는 위가 너무 안 좋아 앞으로 1-2년 정도 약을 계속해서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친척들에게 도움을 부탁해보긴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했다. 그래도 너희 남매들은 항상 즐거운 듯 웃으면서 지낸다라고 했더니, 어머니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힘든 환경이라고 해서 늘 울상만 짓고 있으면, 더 힘들어진다고. 이런 환경이라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야 복이 찾아오는 거라고 어머니께서 말씀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괜찮아요-” 하며 여전히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루는 Guari가 좀 화난 듯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쥬스를 주문하고 나서 말을 건넸다. “오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것도 아니예요.” “왜 그러는데-? 말해봐.” 라고 했더니, 사실은 어떤 손님 때문이란다. 프랑스인 여행객 두 명이 쥬스를 마시고선, 잠시 물 뜨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쥬스값도 내지 않고 도망 가버렸다는 것이다. 여행객들에겐 단돈 10-20 루피라도 그녀에겐 제법 큰 돈인데, 거참 너무했다 싶었다. “그런 나쁜 프랑스인을 봤나-” 했더니, 그녀가 곧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 그 사람들은 20루피를 얻었지만, 다음엔 40루피를 잃을 거여요. 그건 틀림없어요. 그러니 괜찮아요.” 입을 삐죽거리면서, Guari는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그래.” 웃으며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고 있을 때, 그녀와 꼭 닮은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바로 Guari의 어머니였다. 오늘은 파출부를 쉬는 날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딸이 장사를 하고 있으니, 도와주러 나온 모양이었다. 어쩜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어찌 저리도 닮았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나타나자마자 Guari더러 기계를 좀 더 꽉 조이지 않는다고 나무라셨다.(즙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낼 수 있지만, 그만큼 힘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Guari는 대번에 어린애처럼 배시시 웃어 버렸다. 그러자 어머니도 그만 웃고 마는 듯 했다. 우리가 카메라를 들이대니, Guari의 머리를 매만져 주셨다. 금새 딸의 머리를 귀연 소녀처럼 양갈래로 묶어 말아올려 주셨다. 그제서야 Guari는 13살 소녀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진 찍어다가 어디에 쓰려고요?” Guari가 물었다. “아. 한국에 돌아가서 개인 홈페이지에도 올리고, 다른 갤러리 싸이트에도 올리고 뭐 그럴 거야.” 안되는 영어지만, 나름대로 쉽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보는 거예요?” “어. 뭐 한국 싸이트라서 한국 사람들이 주로 보긴 하지만.” “여기도 한국 사람들 많이 오는데.” 하긴, 우리가 바라나시에 머물렀던 1-2월의 여행객 대부분은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응. 한국 사람들 많이 오지. 우리가 인터넷에 너희들 얼굴 사진 올리면, 나중에 너희들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런 것도 가능해요?” “어. 혹시 바라나시 간다는 사람 있으면, 꼭 너희 가게에 들러서 쥬스 사마시라고 이야기 할게.^^” “그래요. 꼭 그래줘요. 부탁할게요.” Guari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아아, 진짜야. 나중에 다른 한국인이 너희들 이야기 보고 찾아와서 우리 이야기 하거든 너 모르는 척 하면 안된다. 알았지?”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절대 안 잊어 버려요. 그렇지만 여기 스쳐가는 여행자들은 우리를 잘 잊어 버려요. 작년에 왔던 우리 친구들은, 올해도 또 바라나시에 오는데 우릴 기억하지 못해요. 우리는 언제나 기억하는데..” 웬지 가슴이 아팠다. 늘 스쳐가는 여행객들, 그들을 친구로 생각하고 가슴에 담아 두는 아이. 잊혀진다는 건 누구에게나 가슴 아플 것이다. “걱정마. 우린 너 안 잊을게. 너나 우리 잊지마. 이건 약속이야. 그리고 한국에 가면 꼭 너희들 이야기 할게. 너희들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쥬스 많이 줘라. 알았지?” “네. 약속할게요.^^” .... 그렇게 굳게 약속하고 돌아왔거늘, 잊어버리고 있었다. 글을 써 내려 가면서도 미안한 마음만 한가득. 혹시 이 글과 사진을 본 누군가 바라나시에 가게 되거든, 벵갈리 토라 한가운데 있는 그 수레에 들러서 꼭, 쥬스 한 잔 마셔 주시길. 그리고, 이야기 해주시길. 한국에서 너희들 이야기 보고 왔다고.... Text by ihaa( http://ihane.com)
openmac
2004-06-29 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