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3 - 효자 정재수
- 태어남 : 1964년 3월(부 정태희, 모 김일순)
- 살던 곳 : 경북 상주시 화남면 소곡2리(배실마을)
- 그 때 : 상주시 사산초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서기 1974년 1월 22일 밤 정재수 이곳에 잠들었으며 이는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소곡리에 태어났다.
십 세의 어린 나이로 혹한의 눈보라 속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출하고자 못다 핀 생명을 바쳤으니.
아! 아버지의 영혼을 덮어주던 그 맑은 효행은 뭇 사람의 심금을 울려 길이 후세에 흐르라
-정재수 비석 전문-
http://eunjagol.invil.org/travel/museum/museum_jung/contents.jsp
===========================================================================================
1.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우리 사회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일천(日淺)한 역사의 수입산 이데올로기는 생각만큼
우리의 삶과 의식에 그리 깊은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반면에 천년 동안 우리의 역사 속에서 온축(蘊蓄)되어 온 유교의 효사상이야말로
기실 그 어떤 것에도 선행하는 본질적 이데올로기라 할 만하다.
생각해보라.
제아무리 막돼먹은 놈이라 할지라도
제 아비와 어미를 욕하는 건 참지 못하지 않던가.
2.
고등학교 때였다.
껄렁패로 유명하던 친구에게 선도 담당 선생님의 구타에 가까운
훈육이 한참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연배가 있으신 선생님들은
그 ‘좋았던 옛 시절’이 그립기도 할 것이다.
그리 두들겨 패도 졸업식 날을 빼곤
누구 하나 선생님께 대드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
유단자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손과 발을 이용한
‘찐한’ 훈육에 기운이 빠진 탓인지 선생님의 입에선
결코 나와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너 같은 놈 낳고 미역국 끓여 먹은 네 에미가 한심하다.”
친구의 주먹이 순식간에 허공을 갈랐고, 예상치 못한 주먹질에
선생님은 얼굴을 감싸 쥐고 쓰러졌다.
“저한텐 뭐라 해도 좋지만 우리 엄마한테만은--.”
다음날 그 아이의 헙수룩한 부모는 자식의 퇴학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죄인처럼 교무실에 한참동안이나 엎드러졌다.
면구스런 선생님도 자신의 부덕에 대해 아이의 부모에게 용서를 구했다.
우리 학교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하극상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결론은 해피엔딩이었다.
2년 동안 책 한번 제대로 펴보지 않았던 녀석은
그 후로 딱 반년을 죽어라 공부해 공업전문대를 갔고,
지금은 꽤 유명한 건설회사의 과장 노릇을 하고 있다.
3.
우리 사회에서 ‘효자, 효녀’만큼 상찬을 받는 수식어도 흔치 않다.
그 간단한 두 글자에 깃든 일상의 헌신과 희생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반면 ‘불효자’라는 딱지만큼 두려운 것이 있을까.
진짜 불효자도 남에게서 이 말을 듣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한다.
하여 우리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 시설에 맡기는 것조차
이웃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게 현대적 효의 방식이지요”라며 이웃이 건네는
선의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다.
내겐 67세의 모친이 계시다.
아직은 기력도 총기도 좋으신 편이다.
맞벌이를 하는 누나네와 살림이 익지 않은 신혼의 동생네
그리고 애 둘에 치인 우리집을 오가시며 소방수 역할에 여념이 없으시다.
하지만 무뚝뚝한 장남인 나는 어머니께 남겨진 날들이 많지 않음을
익히 알면서도 다사롭게 말 한번 건네질 못 한다.
애들 엄마 몰래 쥐어 드리는 용돈 몇 푼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난 영락없는 불효자인 것이다.
어머니의 입에 붙은 “난 됐다, 괜찮어”라는 말에 안도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새끼를 생각하는 맘의 절반만이라도 어머니를 향해야 한다.
먼 후일, 어머니 가신 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에 가슴을 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4.
정재수의 효심은 당연히 현창(顯彰)되어야 하지만
그 아버지의 분별없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명절 분위기에 휩쓸려 그는 주막에서부터 거나하게 취해 있었고
결국 혹한과 폭설이 몰아치는 고갯마루에서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그 추운 겨울밤,
산중에서 의식을 잃어가는 아비를 부르며
공포에 사로잡혔을 어린 재수를 생각하면,
이제 건사해야할 아이를 둘씩이나 둔 내 맘이 다 짠해져 온다.
자식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 주지 못한 아비.
나나 세상의 모든 아비들이 가장 염려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정재수의 동상 옆에 아들 찬흠이의 사진을 덧댄 것은
아비된 자로서의 의무감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돌아온다고 약속하셨습니다'라고 끝맺는 어느 공익광고의 문구처럼
나는 늘 어김없이 돌아와 내 자식의 등받이가 될 것이다.
하여 정재수의 동상은 내게
못난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일깨우는 동시에
아비된 자의 소임을 깨닫게 하는 아픈 거울이다.
덧: 정재수의 동상이 어설픈 계몽주의자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은
언제 봐도 정말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아침 덧글: 잠 안 오는 늦은 밤 쓴 글을 아침에 일어나 읽는 것은 정말 괴롭다.
참 쓸데 없는 말을 많이도 주절거려 놨구나.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