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1 - 증오를 교육하다. 1968년 10월 30일 3차에 걸쳐「울진·삼척지구」해상으로 침투한120명의 무장공비 잔당 5명이 우리의 군·경·예비군의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산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다급한 나머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 군의 집에 침입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그들에게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승복 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자 순식간에 가족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가족 중 이승복 군의 친형인 학관(당시 15세)은 공비에게 36곳이나 찔리는 중상을 입고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공비의 만행을 이웃에 알렸다. -이승복 기념관 설립 동기 중에서- ====================================================================================== 내가 태어난 바로 그해, 참절(慘絶)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던 이승복의 동상이다. 송탄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 중의 하나인 서정리초등학교의 중앙 현관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반공 시대가 낳은 가장 비극적이고 참학(慘虐)했던 이승복의 이야기로 부끄러운 새 연작을 시작한다. 나는 굳이 이 자리에서 반공 소년 이승복이 죽으면서 외쳤다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의 진위에 대해서 길게 논하고 싶지 않다. 또 법정 공방에까지 이르렀던 조선일보 기자의 ‘작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승복이라는 아홉 살 소년의 가엾은 죽음을 몇십 년 동안이나 비뚤어진 방식으로 현창(顯彰)하는 이들의 불순함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이 동상의 기단에는 [반공소년 이승복]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이승복은 과연 반공 소년이었을까? 한 소년의 이름 앞에 ‘반공 소년’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인가. 초등학교 2학년, 불과 아홉 살 꼬맹이에 지나지 않았을 그는 반공이 무언지나 알았을까. 뒷동산을 헤매고 다니며 알밤을 줍거나, 동무들과의 흙장난에 열심이었을 그 아이가 과연 반공을 알았을까. 아니 그가 반공을 알았다면 그래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다. 나 같으면 공포에 질려 엄마의 치맛말기를 말아 쥐고 징징대기만 했을 공포의 상황 속에서 낯선 침입자들에게 두 주먹을 부르대며 그런 용기 있는(?) 외침을 토해낼 수 있었을까? 그게 만일 사실이라면, 한 어린아이의 내면에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게 할 만한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각인시키는 것이 가능했다면, 반공의 이데올로기는 그 반대편이 저지른 참독(慘毒)한 살인만큼이나 무섭고 혐오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나의 유년과 청소년기를 돌아보면 나와 우리의 친구들은 차이를 존중하고 낯섦을 관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질적인 것은 틀린 것이고 우리와 다른 것은 그른 것이라는 천박한 이분법은 이제 우리 세대에게 너무나 익숙한 생각과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다. 무릇 교육은 생명을 사랑하고 보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함에도 우리는 증오와 편견의 교육에 너무 쉽게 길들여졌다.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 있던 원균과 최만리에 관한 기술을 떠올려보라. 장수로서의 삶과 죽음에 부끄럼이 없는 올곧은 무장(武將) 한 사람을 동시대의 더 뛰어난 다른 영웅 한 명을 미화하기 위해 얼마나 왜곡했는가를. 고위관료로서 나라의 명운을 틀어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래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왕의 결정에 반기를 든 결기 있는 신하를 멍텅구리 사대주의자로 매도해 놓았던 것을. 말이 너무 길어졌다. [반공 도덕], [반공 일기], [반공 웅변회] 이제는 다 흘러가 버린 노래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런가? 진정 그런가? 이승복의 동상이 빤닥한 빛을 발하며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고 있듯이 ‘반공’의 레떼르가 붙은 증오와 편견의 교육은 내 아들의 시대에도 여전한 현재형이다.
자투리
2004-06-14 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