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3 - 나 혹은 당신의 가면 동물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동물원의 짐승들이 과연 ‘개선’됐는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짐승들은 그곳에서 약화되고, 덜 위험스럽게 만들어지며, 억압적인 공포감과 고통, 상처와 굶주림을 통해 병약한 짐승들이 되는 것이다. .......니체, [우상의 황혼] ==================================================== 어때 친구, 자네는 이 미치광이 천재의 말에 동의하나? 마르크스가 초기 자본주의의 그늘을 확대해석한 것처럼 이 친구도 19세기 일부 동물원의 야만적인 관리체계만을 보고 성급한 판단을 내린 건 아닐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은 과학적인 관리 시스템을 바탕으로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 칼로리까지 정확하게 계산된 식사가 제공되는 낙원과도 같은 곳이라네. 하지만 동물원을 찾아온 이들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지. “가엾은 것. 눈 덮인 시베리아의 산야를 맘껏 뛰어다녀야 할 녀석이 좁은 콘크리트 우리 안에 갇혀 있구나. 딱하기도 하지.“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사냥감이 부족한 그곳에서 자주 굶주렸고, 불법 포획을 일삼는 포수들의 총구를 피하느라 늘 전전긍긍해야했네. 우리의 삶터는 남벌(濫伐)로 점점 줄어들어 민가의 염소 한 마리를 훔쳐 먹기 위해 우린 목숨을 걸어야했어. 자네나 다른 사람들의 연민과는 무관하게 난 이곳이 썩 마음에 드네. 하여 나의 강대한 턱과 날카로운 송곳니가 효용을 잃은 채 무디어가고, 운동 부족으로 근육들에 지방이 차는 것을, 나보다도 안타까워하는 자네를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자네 역시 본연의 수성을 잃고 길들여진 채 안온한 일상을 꿈꾸는 존재가 아닌가. [트루먼 쇼]에서 씨헤이븐의 낙원을 박차고 나간 트루먼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 자네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자네 같으면 정작 그곳을 떨치고 나가겠는가 말이야. 자넨 자네의 아이들이 교사나 의사,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지 싶지? 왜 그런가?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야. 그러니 더 이상 자네도 내게 위험하고 불편한 자유를 강요하지 말게. 우리는 모두 ‘자유에서 도피’한 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자네나 나나 가면을 쓰고 적당히 일상에 순치(馴致)되어 살아가세.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하지만 때론 얼마간의 연기가 필요하다는 걸 기억하게. 내가 돼지와 다른 대접을 받는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네. 내가 가끔씩 포효하며 갇힌 자의 분노를 연기하는 것처럼, 자네도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의 지루함이 못 견디겠는 양 분노스런 저항의 몸짓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본래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라는 듯이.
자투리
2004-05-27 0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