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큰 아이가 처음 이를 뽑던 날
얼떨결에 추억이 되겠다 싶어 카메라를 집어 들었습니다.
고모가 끌어안고, 엄마가 실을 잡았는데...
핫바지 방귀 새듯 싱겁게도 실만 자꾸 빠집니다.
아이는 죽는다는 시늉을 하며 엄살을 떠는데.
어머니께서는 애처러이 혹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딸과 며느리의 하는 짓을 쳐다봅니다.
제가 카메라를 놓고 나서면 깨끗하게 해결이 될 것도 같은데,
그냥 하는 깜냥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결국은 어머니가 나서서야 해결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집안 모든 일의 해결사(?)이셨습니다.
제가 5학년 되던 해 초여름. 감기를 2년 간 앓으시던 아버지는
기관지 암 판정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죠.
저희 가족은 서둘러 사택을 비우고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옥상에 지어진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 어머니는 생계 방편으로 콩나물을 키우셨습니다.
장독 두 개를 방에 들여다 놓으시고 수시로 "쏴아~~" 물을 주셨죠.
어머니가 처음 그 장독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가신 날 아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보기좋게 자란 콩나물을 파실 요량으로
별 생각없이 동네 시장으로 가셔서 좌판을 벌이셨는데
얼마 팔지도 못하고 텃세에 쫓겨 오셨더군요.
아마도 가난한 목사의 아내이셨던 당신께선 "텃세"개념도 모르셨을 겁니다.
당신이 반찬거리며 생필품을 사기 위해 매일 다니시던 곳이라
그래서 너무나 익숙하게 나서셨을 겁니다.
아무나 사듯, 그렇게 아무나 팔면 되는 줄 아셨던 거지요.
그날 아침 어머니의 눈은 아버지 아플 때 새벽기도 다녀오신 것 처럼
벌겋게 벌겋게 부어 있더군요.
나중에 하시는 말씀이 텃세에 밀려 집으로 쫓겨올 때
그렇게 창피하고 서러울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덕분에 저희 4남매는 웃자란 콩나물 밥, 콩나물 무침, 콩나물 국 싫컷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도 콩나물 국을 좋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