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의 기
정념의 기(旗)
- 김남조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 <정념의 기>(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