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편력기 5 - 도올의 '썰'(說)과 조우하다
도올을 만난 때는 전경 기동대 쫄다구로 기진해있던 1990년 초봄이었다.
강원도에서 수학 선생을 하다 온 고참 하나가 내게 책 한 권을 디밀었다.
"너 책 좋아한다며? 이거 읽어본 적 있냐?"
그 책이 바로 [여자란 무엇인가]이다.
서럽고 눈물나는 쫄병 시절, 나는 밤마다 옥상에서
흐릿한 백열등 하나에 의지해 도올의 책들을 읽었다.
고참들의 휴가 선물용 거북선 제작을 위한 사포질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여담이지만 당시 우리 기동대에는 거북선과 범선 제작 열풍이 불었다.
고참들이 휴가나 제대를 할 때 선물용으로 들고 나가는 것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쫄병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두칼로 나무를 깎고
깎은 나무를 매끈하게 사포질 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책에 한눈파는 내 솜씨가 고참들 눈에 들 리가 없었다.
그 일로 난 고참들에게 몇 번이나 흠씬 두들겨 맞았고,
그러고난 뒤에도 변화가 없자 그들은 혀를 차며
더이상 막손인 내게 일거리를 맡기지 않았다.
덕분에 난 그 지겨운 사역에서 벗어나 좀 더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난 한 번도 입대를 앞둔 후배들에게
군대에서 뭐든 열심히 하라고 충고해 본 적이 없다.
군대 다녀온 이들이면 삼년 통박으로 누구나 깨달은 것이겠지만
군대는 뭐든 잘하는 사람, 나서는 사람이 제일 피곤한 법이다.
한달에 한번 월급을 타는 날이면 우리 부대원들은 닭장차를 타고 서점에 갔다.
알량한 삼만원의 월급 대부분은 책을 사는데 썼다.
밥이야 뭐 군대에서 먹여주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난 도올의 충실한 독자였다.
그러니 통나무 출판사와 도올은 당연히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팔아준 책도 책이지만, 내 소개로 도올의 광신도가 된 이들까지 합하면---.
도올 책의 강점을 꼽으라면 뭐니뭐니해도 독자를 흡인하는 강력한 '재미'다.
이 '재미'의 시작은 도올이 철학자들의 '권위적 언어'를 고집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서점의 철학 코너에 가서 아무 책이나 한권 뽑아 보라.
소위 기획된 몇몇 개론서를 제외한다면
웬만한 인내심과 사전 지식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그 불친절한 언어에 금방 기가 질릴 것이다.
도올은 형이상학의 구름 위에서 노닐던 동료들과는 달리
市井으로 내려와 잡배들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도올의 문체는 내가 이전에 소개한 함석헌을 꼭 빼닮은 것이다.
도올의 큰형인 김용준 선생이 함석헌의 수제자이고
씨알 농장이 도올의 고향인 천안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도올의 언어에 미친 함석헌의 영향력은 불문가지인 것이다.
도올 책의 또다른 매력은 '까발림'이다.
대부분 도올 책의 앞잔소리들은 이런 까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책은 앞잔소리가 본문의 내용보다 더 길다. 정말 웃기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내심 문제로 여기고는 있지만 쉽게 할 수 없는 소리를
도올은 참 '심하게' 까재낀다.
심지어는 자기 스승이나 제자의 사소한 개인사까지도.
나는 그 까발림이 모두 정당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도올의 '패륜적 까발림'이
우리의 지식 사회에서 금기시하던 수많은 문제들을
공개적인 자리에 끌어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고 여긴다.
이 외에도 文史哲을 아우르는 박식과 동서양을 관통하는 해박함
다양한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는 김용옥의 온전한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허나 햇수로 십오년이상 그의 책을 꾸준히 읽어 온
비교적 충실한 독자인 내가 그에게 갖는 아쉬움도 적지 않다.
그는 자신의 많은 책에서 미진하게 다루어진 부분에 대한
후속 작업을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았다.
도올 스스로가 필생의 업으로 천명했던 '기철학'의 체계화는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쪽팔림'도 무릅쓰고 팔자에 없던 한의대에도 간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한의사니 어쩌면 가업을 계승하는 것인지도-
요즘의 그는 학자라기보다는 프랑스 혁명기의 열렬한 계몽주의자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 사회에 보다 많은 계몽이 필요하고 그것에 도올이 적임자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방송 4사를 아우르며 별다를 것 없는 담론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충실한 독자들을 '두번 죽이는' 일이다.
도올은 이제 확산이 아닌 수렴을 꿈꿔야 한다.
그가 약속한 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생각해보면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도올의 停滯는 우리 모두의 손실이다.
그의 용기있는 정진을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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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편력기 연재를 여기서 접을까 합니다.
갤러리를 지향하는 레이소다의 취지에도 어울리지 않는 듯하고,
사진이 기본적으로 가져야할 미학적 요소도 결여된 연재를
지속하는 것은 운영자와 관람자들을 무시하는 태도이기도 하니까요.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장광설에 귀기울여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