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편력기 4 - 들사람 함석헌
생각해보면 난 참 뻔뻔스럽다.
레이소다와 같은 훌륭한 갤러리에 덜렁 책 사진 하나 올려 놓고
미주알고주알 시키지도 않은 장광설에 여념이 없다.
어쩌다 누가 일상 게시판에
'요즘 레이소다가 습작 갤러리화하고 있다'는 따끔한 지적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내게 하는 소린가하여 낯이 화끈거리다가도 며칠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염치없이 같잖은 사진 한 장을 떠억 하니 올려 놓는다.
그나마 미욱한 이 사람을 간혹 찾아주고
허섭스레기 같은 사진에도 추천을 누르는 벗들이 있어
면피를 하고 있지마는 그렇다고 부끄러운 마음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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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을 만난 것은 자율의 탈을 쓴 강제 학습으로 몸과 맘이 황폐해가던 열여덟 가을 무렵이 아닌가 싶다.
한길사에서 나온 20권짜리 함석헌 전집의 1권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그 시작이었다.
함석헌을 읽기 얼마 전, 나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자율학습 시간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다가
감독을 맡고 계시던 윤리 선생님에게 따귀를 맞고 귀를 잡힌 채 교무실로 끌려간 것이다.
어리벙벙한 내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선생님은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들께 여봐란 듯이 소리를 높였다.
"아 글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이따위 책을 읽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선생님은 책의 빨간 표지와 제목만을 보고 상당히 흥분하신 듯 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몇 마디 거들었다.
"어린 놈이 무쟈게 밝히는구만."
"저런 놈은 혼을 좀 내야 해."
"학생과에서 내일 집으로 전화해서 부모님 좀 오시라고 해요."
그때 마침 교무실에 들어오신 다른 선생님 한 분이 내게 영문을 물었다.
이러구러한 얘기를 듣고난 그 선생님께서 윤리 선생님을 밖으로 불러내었고
잠시 후 나는 교무실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책은 물론 돌려 받지 못했고 윤리 선생님의 사과도 없었다.
하지만 난 그 일을 계기로 자율 학습 시간에 자율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함석헌을 읽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다.
함석헌의 책들은 술술 읽혔다.
현학적 허세를 위해 끙끙대며 읽었던 서양철학서들과는 사뭇 달랐다.
함석헌 특유의 구어체와 논쟁� 글쓰기의 방식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나를 당겼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으면서 나는 어렴풋하나마
역사는 역사교과서의 형해화된 개별 사실(史實)의 집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에서는 견자(見者)가 겪어낸 곤고한 삶의 궤적을 보았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는 어둠의 광야에서 외치는 그의 사자후를 들었다.
윤형중 신부와의 논쟁으로 유명한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는
보수적 신앙관에 길들여져 있던 나의 영성을 일깨웠고,
[씨알의 옛글 풀이]는 老莊이라는 동양고전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아직도 청맹과니인 내가
삶과 세계에 대한 짧은 생각이나마 갖게 된 것은 그의 사상에 힘입은 바 크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함석헌과 그의 스승이었던 다석 류영모 선생의 글을 읽는다.
한 날 한 날 자신의 삶의 날수를 세며 하루 하루를 매양 새로운 날들로 사셨던
두 노인의 생각의 알짬들이 나타와 안일에 길든 나를 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