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력기1 - 반공 소년 깨어나다 나는 1968년 충남 부여산이다. 규암 초등학교 시절 일주일에 두 번씩 반공일기라는 걸 썼고, 봄, 가을에는 전교생 모두가 국민교육헌장 받아쓰기 대회를 치러야 했다. 매일 똑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일기-도대체 왜 일기 앞에 반공이라는 수식어가 필요한가?-나 단 한마디도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지루하고 긴 문장의 교육헌장을 왜 암기해야 하는지 어린 내 소견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 난 박정희가 싫었다. 박정희가 죽은 얼마 뒤 중학생이 되었다. 시찰을 온 장학사가 뜬금없이 내게 교실 뒤 환경미화 장식물로 붙어있던 정의 사회구현을 위한 9대 덕목을 물었다. 내가 답변을 못하고 쭈물거리자 얼굴이 벌개지며 당혹스러워하던 교장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무렵 소 키우면 너나없이 부자된다고 정부에서는 송아지 값을 저리로 대출해주었다. 3,4년 뼈빠지게 고생해 頭數를 불려놨더니, 동산만한 황소 한 마리 값이 송아지 반 마리 값이었다. 그래 난 전두환이 싫었다. 소값 폭락으로 거덜난 얼마 뒤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충청도 촌놈이 안양에 온 것이다. 그해 봄, 우연히 놀러간 친구집 거실에서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을 집어왔다. 그 책 한 권으로 내 머릿속은 산산히 해체되었다. 이어 백기완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읽었고 피터 버거와 앨빈 굴드너를 읽었다. 용돈을 아껴 사진 속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펴낸 책들을 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두둥두둥 벌렁벌렁 가슴이 마구마구 뛰었다. 벽력같은 고함이 지르고 싶어졌다. "에라이~ 썩을 늠덜아!" 열일곱 반공소년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자투리
2004-04-20 1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