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들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이다. 학생은 약 20여명이 될까. 작지만 아담한 공간이었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따라 들어오는 이방인을 신기한 듯 일제히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오늘 손님이 오셨으니 모두 인사합시다 하면서 학생들을 내게 인사시켰다. 나는 간단히 내가 멀리 한국에서 왔다는 것과 쿠바의 국부인 호세 마르티의 시를 좋아한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애들은 먼 이방인이 그들의 정신적인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의 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쿠바의 아리랑인 ‘관따나메라’의 가사를 잠시 외워보았다. 이 노래는 호세 마르티의 대표작 <쉬운 시(Versos sencillos)>에 곡을 붙인 것이다.
나는 정직한 사람,
야자나무가 자라는 지방 출신이요.
나 죽기 전,
내 영혼의 노래를 부르고 싶소.
나는 온갖 곳을 지나왔고,
온갖 곳으로 또 간다오.
예술이 있는 곳에선 예술이 되고,
산에 가면 산이 된다오.
내가 스페인어로 호세 마르띠의 시를 낭독하니 애들의 눈이 더욱 똥그라졌다. 선생님은 우리도 실력을 보여드리자고 하면서, 학생 하나를 지목했다. 그 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낭독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내 귀에 애들이 호세 마르티의 동화를 낭독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한두 소절 외운 뒤에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고개를 까딱하니, 그 친구가 바통을 이어받아 또 외우고, 또 넘기고 하면서 순식간에 온 반 애들이 동화를 줄줄 외운다. 아주 잘 훈련된 모습이었다. 그들은 긍지에 찬 모습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호세 마르티의 명구를 떠올렸다.
유럽의 학자들이 중남미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면서, ‘히스패닉 아메리카(America hispanica, 스페인계 아메리카)’, ‘이베리아 아메리카(America iberica, 이베리아 반도계 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America latina, 라틴어권 아메리카)’ 등 자기네에 유리한 이름을 붙여왔는데, 이에 반해 호세 마르티는 ‘누에스트라 아메리카(Nuestra America, 우리들의 아메리카)’라는 절묘한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민족 자결이랄까, 유럽이나 미국의 영향권 하에 놓인 중남미가 아닌 자주독립의 아메리카라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낭독이 끝나자, 선생님은 내게 한마디 해줄 것을 청했다. 나는 먼저 한국을 소개했다. 쿠바가 거인 미국의 코앞에 놓인 작은 섬나라인 것처럼, 쿠바와 크기가 비슷한 한국도 거대한 중국과 경제대국 일본의 사이에 놓인 반도라는 것. 거기다가 북으로 러시아와 인접해 있으며,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처럼 현재 한국에도 미군이 주둔해 있다는 것. 이렇게 세계 4강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으면서,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는 한국의 안타까운 현실과 어려운 지정학적 위치에서 살아남으려면 약소국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 각자가 깨어있어야 하고, 그런 정신을 우리들의 선각자들이 요청했다는 것을 상기하였다. 나는 끝으로 쿠바의 푸른 창공처럼 아이들의 미래에도 찬란한 햇살이 내려 쬐길 기원하면서 말을 맺었다.
애들의 밝은 얼굴과 암빠로 선생님의 따뜻한 환대를 뒤로 하고 나오면서, 나는 수십 년에 걸친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비록 경제적으론 어렵지만 꿋꿋하게 자주독립의 길을 고수해 나가고 있는 쿠바의 자존심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카스트로의 사후에도 쿠바는 호락호락하게 미국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많은 쿠바의 지식인들은 쿠바가 경제적인 문호를 개방하더라도, 정치체제만은 중국식으로 사회주의를 고수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바라는 것은 꼭 사회주의가 아니라, 그들의 자존과 자주를 지키는 정치체제이다. 호세 마르티가 역설한 ‘우리들의 아메리카’인데, 하지만 현실에서 닥쳐오는 미국이라는 태풍은 얼마나 강성한가? 그리고 카스트로의 혁명으로 미국 마이애미로 쫒겨간 과거 기득권 세력은 오늘도 호시탐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으니, 쿠바의 미래도 평탄하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1990년대 초반, 구 소련의 붕괴로 쿠바 사회는 심각한 시련에 봉착했었지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제 그 저점을 통과하고 쿠바 경제는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비료가 없어서 유기농업을 시도했는데, 그 열매가 열려서 이제 쿠바는 세계적인 유기농업 성공사례가 되어 학자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작년에 대규모 농업시찰단이 다녀갔고, 최근 일본에서는 쿠바 유기농 성공사례를 연구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란 책이 나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